단양우씨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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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우씨(丹陽禹氏)는 성씨(姓氏)가 보편화된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득성(得姓)하게 되었고, 현(玄)을 시조(始祖)로 하여 6世 시중공(侍中公) 선조(先祖)가 벼슬길에 오르자 우씨(禹氏)가 비로소 정사(正史)에 나타났다. 현(玄) 시조(始祖)는 단양(丹陽)에 정착(定着), 세거(世居)하면서 고려(高麗) 현종(顯宗) 5(1014)년에 진사(進士)로 등과(登科)하여 정조(正朝)(향직(鄕職)의 7품상의 품계) 호장(戶長)(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을 지냈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고려(高麗) 때 문하부(門下部)의 정2품)에 추증(追贈)되었다.
우씨(禹氏)는 시중공(侍中公)이 향공진사(鄕貢進士)로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고려(高麗) 고종(高宗) 16, 1229년(年))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까지 이르고 그 아들 5형제(五兄弟)가 또한 모두 등과(登科)하고 현달(顯達)하면서 시중공(侍中公)까지 독자(獨子)로만 이어오던 가문(家門)이 크게 번성(繁盛)하여 단양우씨(丹陽禹氏)가 당대(當代)의 관료가문(官僚家門)으로 등장(登場)하게 되었다.
시중공(侍中公)의 장남(長男) 천규공(天珪公)이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2남(二男) 천계공(天啓公)은 판서(判書), 3남(三男) 천석공(天錫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4남(四男) 천우공(天佑公)은 군기윤(軍器尹), 5남(五男) 천성공(天成公)은 낭장(郞將)을 각각 역임(歷任)한 바, 후손(後孫)들이 이를 기념하는 석비(石碑)를 단양(丹陽)에 세웠다.
이후 7세(七世) 천규공(天珪公), 천석공(天錫公)의 자손(子孫)을 중심(中心)으로 크게 번성(繁盛)하였고, 8세(八世)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先生)의 출현(出現)으로 인해 단양우씨(丹陽禹氏)가 더욱 명성(名聲)을 떨치게 되었으며, 또한 10세(十世) 문하시중(門下侍中) 양호당(養浩堂) 현보공(玄寶公)과 그의 아들 5형제(五兄弟)가 모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6부자(六父子)가 동시(同時)에 고려조정(高麗朝廷)에 출사(出仕)하여 요직(要職)에서 국사(國事)를 보게 됨으로써 단양우씨(丹陽禹氏)가 더욱 명성(名聲)을 떨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