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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

충정공 안정공 파주종중.jpg

충정공 안정공 제단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 460-1 (묘소는 현재 이북에 있어서 제단만 두고 있는 실정임)

충정공 우현보 (忠靖公 禹玄寶 1333 – 1399)

 

“나는 오직 단양우씨의 족보는 퇴계 이황선생이 처음으로 수찬(修撰)하였고 보첩(譜牒)을 중간(重刊)할 때에는 나의 종조부인 성호 이익선생이 또 서문을 지어 세상에 전하였으니 이점이 타보(他譜)가 가지지 못한 점이다.

이같은 까닭은 단양우씨에는 문희공과 충정공의 양선생이 계셨기 때문인 것이다. (목천(木川) 경신보(庚申譜) 서문(序文)(1800)옴김, 공조판서 이가환지음)”

 

본관은 단양이다. 고려말의 문신이며 충신이다. 자(字)는 원공(原功)이고 호(號)는 양호당(養浩堂) 또는 독락당(獨樂堂)이다. 우현보(禹玄寶) 할아버지는 아버지 삼중대광보국승록대부(三重大匡輔國崇綠代父) 적성부원군(赤城府院君) 우길생(우길생(禹吉生)할아버지와 소국부인(小國夫人, 고려시대 외명부 정.종1품의 봉작) 경주김씨 전교령(典敎令) 승책(承策)의 따님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슬하에 장남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 우홍수(禹洪壽), 차남 예안부원군(禮安府院君) 우홍부(禹洪富), 3남 관찰사 안정공(安靖公) 우홍강(禹洪康), 4남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우홍득(禹洪得) 5남 예조판서(禮曹判書) 우홍명(禹洪命) 아들 5형제를 두었으며, 고려조 향공진사(鄕貢進士)로 등과하여 정조(正朝) 호장(戶長)을 지냈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추증된 우현(禹玄)이 시조로 단양우씨의 10세손이시다.

우현보할아버지는 고려말의 청렴강직(淸廉剛直)한 명신(名臣)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浦隱)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鄭夢周의 시신(屍身)을 거둬들여 장례를 치렀다 하여 탄핵을 받아 경주로 유배당하였다가 곧 석방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淸白吏에 추서(追敍) 되었다. (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1372년(공민왕21) 시무책(時務策)을 상소하여 당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국력을 키워 왜구에 대비하는 획기적인 제안을 하였는데 첫째 백성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유사시에 대비할 것, 둘째 훌륭한 군사지휘관 즉 양장(良將)을 기를 것, 셋째 군량미를 비축할 것, 넷째 국왕이 더욱 근검절약하여 백성들의 모범을 보일 것 등을 상소하여 우국충정의 기백과 국력을 키우는 혜안을 보여주었다.(高麗史列傳 번역문)

이는 栗谷李珥의 십만양병설보다도 230여년 앞선 개혁안이었다.

1392년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통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였다. 이때 조선 개국을 반대했다는 우현보 할아버지 집안은 혹독한 재앙의 시작이었다. 장손인 우성범이 공개 참살되었고 5형제 아들중 둘째 홍부 예안군, 셋째 홍강 안정공할아버지만 살았고 3분은 장살당하셨다. 이런 비극뒤에는 정도전의 사감이 원인이었다.

고려와 함께 몰락했던 단양우씨 가문이 극적으로 부활할수 있었던 것은 太宗 이방원(李芳遠)과 좌주(坐主 시험관)와 문생(門生 급제자 자신을 부르는말)이라는 특별한 관계가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와같은 인연으로 인하여 李芳遠에게 결정적인 제보를 하여 禹洪富와 禹洪康는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어 단양우가는 政治的 재기에 성공하여 조선시대에도 벼슬이 끈이질 않았다.

禹玄寶할아버지는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오형제가 거의같은 시기에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으며 아버지와 다섯 아들 오형제가 정부 요직에 두루 포진해 있으니 한 집안에서 국사를 논할 지경이었다. 이는 또한 高祖父인 侍中公 우중대(禹仲大)할아버지가 일찍이 이러한 경사가 있었는데 禹玄寶할아버지가 또 이어서 그러한 경사가 있으니 고금에 드문 일 이었다.

고려 왕조가 무너진뒤 은거하면서 堂號를 獨樂堂으로 고쳤다.

1400년(정종2)11월13일 할아버지는 병으로 타계하시니 향년 68세 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나라에서는 조회를 삼일 동안 정지하고 중관(조선시대 내사부의 벼슬)을 보내어 사제(賜祭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내려줌)하고 부의를 하사하였으며 충정(忠靖)의 시호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6권)

그가 죽은 지 300여년 후 22대 정조대왕은 경기도 황해도 유생들이 재차 숭양서원(崇陽書院, 경기 개성에 있는 정몽주 모신 서원, 선조8년 (1575) 사액되었음)에 배향하여 그 높은 뜻을 기리도록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고현(古縣)의 금이동(金伊洞) 임(任)좌원에 안치되었데 선영들의 묘소와 떨어져 있어 그곳 사람들이 독총(獨總)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는 그가 죽음에 임하여 자손들에게 “나는 다만 한 사람의 망국의 대부이다. 선영에 부장하지 마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2007년 10월에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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