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종회
I . 丹陽禹氏 安靖公派 固城門中
1. 上系圖(참고: 안정공파족보)
[단양우씨 청장년회 경남지회 고성문중 소개]단양우씨 청장년회 경남지회 고성문중 방문 책자 원고작성: 2019.12.20. 우평석
2. 입향 및 선조의 由來
1) 12世 元瓊
安靖公 洪康의 七子로 太祖朝에 文科에오르고 丹城으로 移居하시다.
墓: 壬亂으로 墓所不明하야 晩時之歎이나 宗中會議로 多年間의 餘恨을 解消코져 祭壇設立을 爲하여 子 廷芝墓區域內 左上便으로 設定
2) 15世 摠世(1580~1660)
‘일찍이 父를 잃고 壬亂을 當하여 어머니 姜氏를 모시고 晉州永耳面生谷嘉植山에 가서 끝내 禍를 免하시다’로 되어 있는 것으로 비추어
16世紀 末에 처음으로 入鄕한 것으로 추측한다.
3. 齋室, 亭 및 碑
1) 齋室
고성문중에서 선조 12世 元瓊 선조부터 이후의 선조 시향을 봉행하는 여러 개의 재실이 있다.
(1) 嘉植齋: 12世 元瓊 선조부터 20世 漢昌, 繼績 선조의 시향을 매년 음력 시월 보름 직전 토요일에 모심, 영오면 성곡리에 위치함
(2) 嘉書祠: 20세 漢周 선조부터 이후의 선조 시향을 매년 음력 시월 보름 직전 토요일에 모심,
영오면 성곡리에 위치함
(3) 追念齋: 21세 禎吉 선조부터 이후의 선조 시향을 모심.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위치함.
(4) 追慕齋: 21세 禎一 선조 선조부터 이후의 선조 시향을 매년 음력 시월 보름 직전 토요일에 모심,
영오면 성곡리에 위치함
(5) 五鳳齋: 21세 鳳海, 鳳善, 鳳興, 鳳龍, 鳳彩 선조부터 그 이후의 선조 시향을 매년 음력 시월 보름 직전 토요일에 모심,
영오면 성곡리에 위치함
(6) 永慕齋: 22세 聖紀 선조 이후의 선조 시향을 매년 음력 시월 보름 직후 일요일에 모심,
영현면 침점리에 위치함
2) 亭
농산정(農山亭)
가식산 기슭에 있는 정으로 효열비(孝烈碑)가 있으며 매년 3월 15일에 강륜계(講倫契)가 열려 충효사상을 추모하고 있다.
3) 비
(1) 孝行碑
21世 禎吉 孝行碑,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덕양전 옆에 추념재(追念齋)와 나란히 위치함.
‘천성이 孝道하여 友愛로워 父母님을 정성을 다하여 奉養하시었고, 兄弟間 和睦하며 친구들과는 서로 도우셨다. 執義 閔致亮이 孝行碑를 撰하였고 孝行碑는 孝行碑가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다.’고 派譜에 기록되어 있다.
(2) 善行碑
25世 興永 善行碑. 영오면 성곡리에 위치함.
‘自于歸順 父母見善行碑 參奉宗梡松山權載圭撰記實’고 派譜에 기록되어 있다.
(3) 孝烈碑
26세 문수 효열비. 영오면 성곡리에 위치함. ‘性品과 行實이 순수하고 어른께 孝道하고 喪事를 치름에 禮를 준수하여유감이 없으셨다.
이 일은 孝烈碑에 적혀 있다.’고 派譜에 기록되어 있다.
4. 인물
1) 禹貞相(1917년~1966년)
본관은 단양(丹陽). 호는 소산(疏山). 경상남도 사천 출신. 아버지는 덕춘(德 春), 어머니는 조재묵(趙在默)이다. 1933년에 사천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다음해에는 통도중학교(通度中學校)에 입학하였으며, 1936년 양산 통도사에서 구암(龜巖)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1938년에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사교과(四敎科)를 수료하였으며, 같은 해에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41년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경도임제대학(京都臨濟大學)에서 선학(禪學)을 공부하였다. 1945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으며, 동국대학교에 불교학과가 신설되자 입학하였다. 1950년 불교학과를 졸업, 3년 후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에 입학하여 1956년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4년에는 경기대학교에서 부교수가 되었고, 1955년에는 육군사관학교에 불교부를 창설하고 지도교수가 되기도 하였다. 1960년 동국대학교 부교수, 1963년 교수가 되었다. 다음해에는 불교문화연구소의 간사를 맡았고, 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조선전기불교사상연구』와 『교양불교』가 있으며, 공저로는 『한국불교사』·『한국의 인간상』이 있다. 주요논문으로는 「원각사탑파(圓覺寺塔婆)의 사상적 연구」·「이조불교의 호국사상연구」 등 다수가 있다.
II. 지역 소개
1.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경상남도 고성군의 최북단에 위치한 내륙 지역으로서 북서쪽에는 진주시 금곡면과 경계하고, 대전통영고속도로 연화산 나들목이 소재하는 교통 요충지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교육, 문화, 경제적으로 진주 지역과 내왕이 잦다. 일찍이 야산 개발이 잘되어 밤의 주산지이며 또한 과수 재배가 활발하여 질 좋고 맛있는 배와 감이 많이 생산되고, 기름진 농토와 수리시설이 잘되어 호박, 고추 등 특작 재배기술의 발달로 태극호박 등 고품질 농산물이 연중 대도시로 출하되며, 특히 낙농을 주로하는 축산의 발달로 1차산업의 전 부문을 망라하고 있다.
영오면(永吾面)은 본래 진주군의 지역으로서 영귀골의 이름을 따서 영이곡면(永耳谷面)이라 하여 대동(大洞), 영동(永洞), 수서(水西), 성곡(省谷), 동동(東洞), 성산(城山), 양산(陽山), 연향(連香), 본당(本撞)등의 9개 동리를 관할하였으며 서기 1906년 9월 24일자 칙령 제49호로 진주군에서 고성군으로 내속되면서 영이곡면(永耳谷面)과 영읍곡면(永邑谷面)으로 나누어졌다.
서기 1914년 3월 1일자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2호로 영이곡면과 영읍곡면의 서동, 동동과 진주군 금곡면의 덕계동, 성산동, 석계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영오면으로 개칭하고 오서(吾西), 오동(吾東), 영대(永大), 영산(永山), 성곡(城谷), 연당(蓮塘), 양산(陽山)의 7개 동리로 개편하여 관할하였다.
서기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오서, 오동, 영대, 영산, 성곡, 연당, 양산의 7개리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영오면은 고성읍에서 28.9㎞ 북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개천면, 남쪽은 영현면, 북서쪽은 진주시(금곡, 문산, 진성면)와 접하고 있다.
북서쪽으로 해발고도 100∼200m의 백암고개·마치고개 및 탕근산(170m) 등을 경계로 진주시 금곡면(金谷面)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선유산(仙遊山:420m), 연화봉(蓮花峰)을 경계로 영현면(永縣面)과 접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오동리 일대에서 옛날부터 재배하고 있는 대마(大麻)가 특산물로 이름나 있으며 면내의 문화재 현황은 영산리에 성터가 있고 연당리에 고분군이 있다.
2. 성곡리 생곡마을
성곡리는 본래 진주군 영이곡면(永耳谷面)의 지역으로서 생실 또는 생곡이라 하였는데 1895년(고종 32년)에 고성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영동 일부를 병합하여 영오면의 성곡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생곡(生谷)과 금산(金山)마을이 있다.
동명의 유래(由來)
생곡마을은 본래 생실 또는 생곡이라 하였는데 1984년에 고성군의 행정구역 확정시 성곡리 생곡마을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람이 살게 된 것은 약 400년전 임란때 단양우씨(禹氏)가 입촌, 가식산(嘉植山)에서 피난하여 정착하게 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경주김씨(金氏)가 입촌하였고 약100년전에는 밀양박씨(朴氏)가 입촌하여 현재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마을 남쪽의 연화산(蓮華山) 줄기가 뻗어내려 마을 앞 뒷산을 형성하고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생곡천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입구의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하다. 그리고 성곡천을 경계로 면소재지 낙안마을과 접하고 있으며 마을 입구의 약 300여년된 느티나무 3그루가 마을의 수호신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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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住民)
마을 주민은 47가구에 144명(남자: 73명, 여자: 7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의 성씨는 단양우씨(禹氏), 경주김씨(金氏), 밀양박씨(朴氏), 김해김씨(金氏)등 제씨가 살고 있다.
주민의 생업(生業)
주민의 생업은 농업이 주업으로 축산(한우와 낙농)과 과수(밤, 감등)를 하는 농가도 있으며 근래에 와서 하우스재배를 하는 농가도 있어 농가소득이 높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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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住居環境)
마을의 초가 지붕은 1970년대에 스레트와 기와등으로 전면 개량하였으며 지금은 현대식 주택을 건축하는 가두도 있다. 그리고 주택구조도 입식부엌과 수세식변소로 개량을 추진하고 있고 전기, 전화, TV등 문화시설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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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育)
초·중등학교 교육은 영오초등학교와 영천중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으며 고등학교는 영진고등학교와 진주 문산 등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
(亭)과 재실(齋室)·비각(碑閣)
◇농산정(農山亭)
가식산 기슭에 있는 정으로 효열비(孝烈碑)가 있으며 매년 3월 15일에 강륜계(講倫契)가 열려 충효사상을 추모하고 있다.
◇재실(齋室)
경주김씨(金氏)문중에 모선재(慕先齋)가 있으며 단양우씨(禹氏)문중에 가식재(嘉植齋)와 오봉재(五鳳齋) 그리고 가식산 기슭에 가서사(嘉書祠)가 있다.
◇비각(碑閣)
마을 입구에 경주김씨(金氏) 쌍효각(雙孝閣)이 있으며 마을 서쪽 입구에는 밀양박씨(朴氏) 선행비가 있다.
3. 영현면
영현면(永縣面)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고성군에 있는 면이다. 군소재지로부터 북서쪽 20 km 지점에 위치하고, 지방도 제1009호선과 지방도 제1016호선이 연결되어 도로망이 편리하며 산간내륙성 기후로, 쌀, 보리 위주의 경종농업에 종사해 왔으나, 근래에 와서는 시설채소(마디호박, 풋고추)와 밤, 단감, 배 등의 과수 재배면적이 확대되고 있어 소득이 증대되고 있다. 대법리에 계승사가 위치하고 있고, 도립공원 옥천사 진입도로가 신분리 신촌 마을에서 시작되고 있다.
영현면(永縣面)은 본래 영선현(永善縣)의 지역인데 신라때에는 일시 고성군에 예속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에 진주군(晋州郡)에 예속되었으며, 서기 1906년 9월 24일자 칙령 제49호로 다시 고성군으로 귀속되면서 영현면으로 개칭하여 연동(蓮洞), 화촌(花村), 신촌(晨村), 분촌(盆村), 침촌(砧村), 봉림(鳳臨), 영동(永洞), 부촌(芙村), 대촌(大村),봉대(鳳台), 발촌(鉢村), 추촌(楸村)의 14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서기 1914년 3월 1일자 경상남도령 제2호로 고성군의 면을 병합 할때 영현면으로 존치하여 관할에 연화(蓮蓮), 신분(晨盆), 침점(砧店), 봉림(鳳林), 영부(永芙), 대법(大法), 봉발(鳳鉢), 추계(楸溪)의 8개 동리를 두었고, 1915년 10월 10일에 면이 설치되어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그대로 8개 법정리에 16개 행정리 22개 반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현면영현면위치- 동쪽은 어산(御山)·송구산(松求山:527m) 등 해발고도 400∼500m의 봉우리를 경계로 대가면(大可面), 서쪽과 남쪽은 백운산(白雲山:391m)·양전산(陽田山:310m) 등을 경계로 진주시 금곡면(金谷面)과 상리면(上里面), 북쪽은 연화봉(蓮花峰) 등을 경계로 영오면(永吾面)과 접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영현면은 고성읍에서 20.3㎞ 북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대가면, 서쪽은 사천시, 남쪽은 상리면, 북쪽은 영오면과 접하여 있다. 문화 유적지 현황은 성터로서 연화리 성터와 대법리에 배병복(配兵伏)이 있으며 영현지석묘(支石墓)가 있고 사찰지로 대법리사지(寺址)등이 있다.
4. 침점리(砧店里)
침점리는 본래 진주군 영선면(永善面)의 지역인데 광무(光武) 10년(서기 1906년)에 고성군에 편입되어 1914년 3월 1일자 경상남도령 제2호로 고성군의 면을 통·폐합할 때 침촌(砧村)과 점촌(店村)을 병합하여 영현면의 침점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분동하여 행정리로 침점1구와 침점2구 마을이 있다.
동명의 유래(由來)-
침점마을은 1907년 한일합방 이전에는 관동으로 칭하다가 고성군이 면을 통·폐합할 때 침촌과 점촌의 윗자를 따서 침점리로 하였으며 1984년에 침점리를 분동하면서 행정마을의 침점1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맨 먼저 평강채씨(蔡氏), 삭영최씨(崔氏), 달성서씨(徐氏)가 입촌하여 살았다고 전하고 았으나 고증(考證)은 없고 1670년경에 평택임씨(林氏)가 입촌하고 다음으로 단양우씨(禹氏), 김해김씨(金氏), 김녕김씨(金氏)등 제씨가 입촌하여 살고 있는 면 소재지 마을로서 면사무소, 경찰관 파출소, 우체국, 농협과 초·중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침점 1구는 영현면의 중심지에 위치한 면소재지 마을로서 동쪽은 금태산의 두 줄기가 뻗어내려 있고 서쪽은 영천강이 서북으로 흐르고 강주변에 조성된 평야는 비교적 넓은 들판으로 비옥한 토질이며 수원도 양호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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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住民)
마을 주민은 43가구에 117명(남자:55명, 여자:62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의 성씨는 단양우씨(禹氏), 평택임씨(林氏), 온양방씨(方氏)등 제씨가 살고 있다.
주민의 생업(生業)
주민의 생업은 전통적인 농업으로 일부 축산(한우 호당 2∼3두 사육)과 과수(밤,감등)를 겸하고 있는 농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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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住居環境)
마을의 초가 지붕은 1970년대에 스레트와 기와 등으로 전면 지붕개량을 하였고 지금은 현대식 주택을 건축하는 가구도 있으며 주택구조를 입식부엌과 수세식변소로 개량을 하고 있고 전기, 전화, TV 등 문화시설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
(敎育)
초·중등학교 교육은 영현면의 초·중등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으며 고등학교는 고성, 진주등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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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齋室)과 지명 일화(地名 逸話)
◇재실 : 마을내에는 단양우씨(禹氏) 분중의 재실이 있다.
◇거안산(居案山) : 현재 거안산으로 부르고 있는 안산으로 옛날에는 거사안산으로 산 맞은편의 억고산(憶古山)밑에 거사 수십 인이 거주한 흔적이 남아 있다.
◇벼락바위 : 옛날 장군이 숨어 피신한 곳으로 일명 장군바위라 부르고 있으며 수륙십자로(水陸十字路)의 청석바위와 다리 등이 있다.